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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삼국유사 속의 설화, 도화녀와 비형랑

 

 

설화는 한 민족 사이에 구전되어 오는 이야기를 총칭하여 말한다. 

 

그리고 설화를 크게 나누면 신화, 전설, 민담의 세 가지가 있다. 설화의 발생은 자연적이고 집단적이며, 그 내용은 민족적이고 평민적이어서 한 민족의 생활감정과 풍습을 암시하고 있다. 또 그 특징은 상상적이고 공상적이며, 그 형식은 서사적이어서 소설의 모태가 된다. 이러한 설화가 문자로 정착되고, 문학적 형태를 취한 것이 곧 설화문학이다. <출처, 네이버백과사전>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유사는 역사서이면서 대표적인 설화문학의 보고라 할 수 있겠다. 구전으로만 전해지다가 사라져버릴 수도 있었던 삼국시대 사람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문자로서 우리에게 전해주었으니 일연의 업적에 감사할 따름이다.

 

설화문학에서 대표적인 유형 중 하나가 야래자(夜來者)이다. 말 그대로 밤에 찾아오는 손님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도 야래자 유형의 이야기가 몇 차례 등장한다. '도화녀와 비형랑', '무왕', '후백제와 견훤'이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야래자 이야기다.

 

오늘은 삼국유사 「기이편의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를 통하여 그 시대를 들여다 보겠다.

 

 

재임 4년만에 단명한 신라 제25대 진지왕

 

576년에 즉위한 신라 제25대 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인 진지왕이다.

 

그는 4년간 왕위에 머물렀던 6세기 후반을 짧게 거쳐간 인물이다. 당시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왕을 지나며 한반도의 주도적인 세력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진지왕은 20대 초반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등극하여 불과 4년 만에 왕위를 진평왕에게 물려주고 말았다.

 

 

▲ 진흥왕때의 영토확장

 

진지왕의 죽음은 법흥왕이 26년, 진흥왕이 36년간 재위하며 나라가 안정되어가는 시기에 일어난 뜻밖의 일이다. 다음에 보위를 이은 진평왕은 무려 53년을 왕위에 있었다. 진지왕의 죽음에 대하여 『삼국사기』에서는 진지왕이 죽자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다는 순탄한 이양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일연은 "정치가 어지럽고 음탕함에 빠져 나라 사람들이 폐위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4년만에 혈기왕성한 왕이 단명한 이유를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삼국유사에도 그 이상의 설명은 없지만 「기이」편에 기록된 도화녀 이야기로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한 일연의 생각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진지왕은 일찌감치 태자로 책봉되어 있던 그의 형이 태자의 자리에서 죽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그를 한창 국가 부흥의 가속도가 붙어 있을 때 신라의 조정은 부적격한 왕이라 하여 그대로 놓아 두지 않았다. 새 왕은 진흥왕의 뒤를 이어 부활의 날개짓을 펼쳐야 하는데, 20대의 혈기방장한 진지왕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진지왕의 뒤를 이은 진평왕은 진지왕의 조카 그러니까 먼저 죽은 태자의 아들이었다.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

 

사량부에 사는 백성의 딸이 자태가 요염하고 얼굴이 예뻐 도화랑이라 불리고 있었다. 왕이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관계를 가지려 했다.

 

여자가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바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지아비가 있으면서 다른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은 비록 황제의 위력으로도 끝내 빼앗지 못합니다."

"죽일테면 어쩔테냐?"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참수를 당할지언정 달리 바라지 않습니다."

 

왕이 희롱조로 말했다.

"지아비가 없으면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왕은 놓아 보냈다. 왕이 페위되고 죽은 것이 그 해였다. 

 

위 이야기에서 진지왕의 행동이 폐위를 당할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유부녀를 불러 관계를 가지려는 진지왕의 행동에서 그의 음탕함을 엿볼 수 있으며, 이런 그의 행동들이 삼국의 긴장속에서 뻗어나가려는 신라 왕실 입장에서는 위기감으로 비춰 졌을거라 짐작이 간다.

 

2년 뒤 여자의 남편이 죽었다. 열흘쯤 지난 후였다. 홀연히 밤중에 왕이 옛날 모습을 하고 여자의 방에 찾아와 말했다.

"네가 옛날 응낙한 바 있지? 네 남편이 없으니 이제 되겠느냐?"

 

여자는 가벼이 응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아뢰었다.

"군왕의 뜻이니 어찌 이를 피하겠느냐."

여자의 부모는 딸을 방으로 들어가게 했다. 왕은 7일간 머물렀다. 다섯 빛깔의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했다.

 

 

7일이 지난 다음 홀연 자취를 감추고, 여자는 그로 인해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차서 출산을 하려할 때 천지가 진동하였다.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아 이름을 비형이라 하였다. 

 

밤에 찾아온 손님은 바로 진지왕이었다. 죽은 혼령이 되어서까지 도화녀를 잊지 못해 찾아온 진지왕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까? 이쯤되면 진지왕을 단순히 호색한으로 치부하기보다 도리어 순진한 로맨스남으로 생각하는게 맞지 않을까.

 

어쩌면 '도화녀와 비형랑'은 왕이면서도 세간의 여자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는 교훈적인 이야기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는 계속된다.

반신반인인 비형랑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났지만 사람을 돕는 귀신으로 그려진다.

 

진평대왕은 그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들여 길렀다. 나이가 열다섯에 이르자 집사에 임명하였다.

 

비형랑은 날마다 밤에 나가 놀다 돌아왔다. 왕은 날쌘 군사 50명을 시켜 지키게 하였는데, 늘 월성을 훌쩍 뛰어넘어 황천의 언덕 위로 가 귀신들을 이끌고 놀았다.  용사들이 수풀 속에 엎드려 엿보았다. 귀신들은 여러 절에서 새벽 종소리가 들리자 각기 흩어졌고, 비형랑도 돌아갔다.

 

 

 

군사들은 이 일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과 논다는 데 정말이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 북쪽 고랑에 다리를 만들어 보아라."

 

비형랑은 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 무리들에게 하룻밤에 돌을 다듬어 다리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 다리 이름이 귀교다. 

 

삼국유사의 '도화녀와 비형랑' 이야기에서는 정치에 무능하고 음란에 빠져 왕의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진지왕의 모습이 조금은 색다르게 그려졌다. 마치 현실에서는 실패한 왕을 다른 역할로 복권시켜주고 있는 느낌마저도 든다.

 

불명예스럽게 왕위에서 쫓겨난 왕을 혼이지만 세상에서 못다 이룬 일을 보상하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을까? 설화 속에 숨겨진 의미에 대한 해석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