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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동포에게 전했던 마지막 유언을 되새기며

 

[안중근의사기념관] 안중근 의사가 동포에게 전했던 마지막 유언을 되새기며

오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 역사가 긴 만큼 우여곡절도 그만큼 많았던 게 사실이다.

지리적인 위치로인해 국제 정세의 힘겨루기 사이에서 자의반 타의반 침략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 조상들은 분연히 일어나 죽음을 무릅쓰고 구국의 선봉장이 되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다. 

수많은 의사와 열사 중에 조선을 침략하여 동양평화를 무너뜨린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독립운동가 안중근 의사를 남산에서 만나게 되었다.

 

안중근의사의 일생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2일 황해도 해주에서 3남 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의사의 집안은 천석지기의 대지주였으며 부친 안태훈은 소과에 급제한 학문이 높은 분이셨다. 안의사의 아버지는 유교적인 집 안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개화사상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 분이 나중에 자신을 포함한 가족 30여명을 천주교에 입문시키고 세례를 받게 하는데 안의사의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1905년 망국의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구국을 도모하고자 상해로 건너갔으나 1906년 부친의 별세로 귀국하였다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관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하였다.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후 의병을 모집하여 홍범도 의병부대와 연합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펼쳤다. 하지만 포로석방 문제로 오해가 생기고 진지가 발각돼 대패하고 말았다.

 

1909년 1월, 11명의 동지들과 4번째 손가락을 잘라 나라를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는  단지동맹을 맺었고 그 해 9월 조선 침략의 원흉이자 동양 평화의 파괴자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저격하기로 마음 먹는다.

그리고 10월 26일 하얼빈 역으로 가서 이토를 향해 3발의 총탄을 쏘았다. 총에 맞은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절명하였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의사는 일본인들로만 구성된 법정에서 이미 예견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안의사는 '나는 개인적으로 이토를 죽인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동양 평화를 깨뜨린 원흉을 의병대장의 이름으로 죽인것이니 국제 포로법을 적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질리 만무했고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의연히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라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고 1910년 3월26일, 안의사는 당당한 모습으로 의로운 죽음을 받아 들였다. 

 

 

안중근의사의 마지막 유언

전시관의 기록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많은 도움을 주었던 프랑스 신부와 두 동생이 사형을 앞둔 안의사를 찾아와 그의 마지막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면회를 하는 모습에 말소리를 입힌 것이었다.

어머님을 걱정하고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하며 어린 아들이 신부의 길을 걷도록 당부하는 안의사의 모습을 보며 잠시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안의사는 자신이 죽으면 시신을 만주에 두었다가 독립이 되면 조선에 이장해줄것을 당부했지만 일본은 혹여 그의 무덤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하여 매장한 곳을 알려주지 않았고 지금까지 그는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안의사는 3년여 동안 만주 등 해외를 돌아다니며 몸으로 부딪쳐 싸우기도 하고 침략자의 우두머리를 저격하기도 하고 옥중에서 자신의 거사의 이유를 밝히는 저서를 쓰기도 하며 31살의 짧디 짧은 생을 살았다.

안의사가 죽기 직전 동포들에게 당부했던 말이 쩌렁쩌렁 들리는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