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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물보다 진했던 핏빛 조선왕족사(3) - 단종의 죽음


세조는 조선의 통치에서는 치적을 보인 왕으로 평가되나, 어린 조카(단종)를 귀양보내고 결국에는 죽이고 마는 비정함을 보인 점에서 영원히 만인의 지탄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이번 글에서는 단종 죽음의 역사적 사실이 실려있는 세조실록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세조실록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휘가 유, 자는 수지다.


1417년(태종 17년) 9월 29일 본궁에서 출생하였다. 세종 12년에 처음으로 진평대군에 책봉되었다가 후에 수양대군으로 고쳤다.
무자년 9월 7일에 예종에게 전위한 다음 날인 수강궁에서 52세의 나이로 죽었다. 혈족간에 피비린내 나는 암투를 벌였던 수양대군의 최후다.

그의 능호는 광릉(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이다.

                                                                                  ▲ 광릉(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사진 : 네이버 백과사전)

세조실록은 1455년 6월부터 1468년 9월까지 세조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모두 49권 18책으로 간행되었다. 원명은 '세조혜장대왕실록' 이다.

세조가 죽은 다음 해인 1469년(예종 1) 4월에 실록청을 설치하여 편찬을 시작했으며 1471년(성종 2)에 완성했다.


영월 하늘에 흐르는 단종의 눈물

사육신 사건이 끝나고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고 영월로 유배보냈다.
유배지는 영월읍에서 수십리 떨어진 깊은 산골의 조그마한 오두막이었다.

이무렵 귀양을 가있던 단종의 여섯째 숙부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다가 탄로나 금성대군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이보흠은 박천에서 척살되었다.
그런 다음 세조는 금부도사 왕방연에게 사약을 가지고 영월부로 내려가도록 했다.

이때 단종은 옆에 있던 궁녀에게 말하길
"어젯밤 꿈에 돌아가신 부왕과 어머니께서 나를 끌어안고 슬피우시는 꿈을 꾸었구나."

그날 금부도사 일행이 사약을 들고 집으로 들어서면서
"노산군은 어명을 받으시오!"
그렇지만 단종은 태연스럽게 그들을 꾸찢었다.
"무엄하구나. 감히 신하된 자가 임금에게 약사발을 올리려 하다니!"

그러자 단종이 입산할 때 함께 따라온 젊은 시종이 나서면서 교살할 뜻을 비쳤다.
그런 후 지체하지 않고 한가닥 활줄로 단종의 목을 졸랐지만 곧바로 죽지않자 허리띠로 몇번을 졸라 죽였다. 17살의 단종은 이렇게 죽었다.

한편 동대문 밖 정업원에 있던 왕비 송씨는 단종이 죽자 매일 앞산에 올라가 영월 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산을 망원봉이라고 불렀다.

18세부터 과부가 된 송씨는 초막집에서 시녀들과 구걸로 끼니를 이어갔다. 이에 세조가 식량을 내렸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그녀는 자줏물을 들이는 염색 업으로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 골짜기를 '자줏골'이라고 불렀다.

송씨는 중종 16년(1521년) 5월, 82세로 경혜공주 아들 정수미의 집에서 죽었다.


현덕왕후에게 혼줄 난 수양대군

세조의 꿈에 자신이 죽인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 몹시 꾸짖은 후 그의 얼굴에 침을 뱉은 후 사라졌다.
"네 이놈! 내 아들의 왕위와 목숨을 빼앗아 갔으니, 난 네 아들의 목숨을 가져 가겠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난 세조가 이마에 땀을 닦고 있을 때 내시가 달려와서 고했다.
"전하, 동궁께서 지금 매우 위급합니다."
세조가 급히 동궁으로 달려갔지만 동궁은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이에 화가 난 세조는 군사들을 보내 소릉(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라고 명령하였다.
관을 파내고 불살라 버리려 했으나, 관에 불을 붙이는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천둥과 함께 비가 내렸다.
그러자 세조는 관을 강물에 던지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강물에 던져진 관은 가라앉지 않고 떠내려가다 이름 모를 나루에 닿았다.  
이 관을 한 농부가 발견하여 강기슭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

그날 저녁 농부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나 자신의 관을 묻어 둬 고맙다고 했다. 
하지만 세조는 이때부터 온몸에 피부병이 생겨 평생을 고생했다.

40년이 지난 뒤 중종때 조광조가 소릉의 회복을 건의했다.
그렇지만 현덕왕후의 관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관을 찾던 관리의 꿈에 현덕왕후가 나타났다.
"내일 관이 있는 곳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밤 동시에 관을 묻어준 농부의 꿈에 나타나, "내일 관아를 찾아 내가 묻힌 곳을 말해주어라."

현덕왕후의 시신은 문종의 능 동쪽에 묻혔다.


세조가 피부병으로 죽기 전까지 고생한 일이나 동궁이 죽은 역사적 사실은 알려져 있으나, 현덕왕후의 얘기는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만큼 세조의 악행에 대하여 죽은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가 꿈에 나타나 응징한 얘기는, 현실성을 떠나 그 당시 백성들의 민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자료 :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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