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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세종과 최만리 - 노랫소리가 듣기 싫다하여 새를 죽이려함은 옳지 않다

 

세종대왕과 한글창제

세종의 위대한 업적 중 백미라 할 수 있는 것은 한글 창제이다.

중국을 세상의 중심으로 알던 시대에 감히 어느 나라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한글 창제를 실행에 옮기다니 정말 대단한 분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한문에 대적해 문자 만들 조짐이 보이면 당장 싹을 잘라야 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세종은 오로지 백성을 위해 은밀히 한글을 창제 하셨다.

 

 

 

세종이 한글을 만든 이유는 백성들이 한자보다 쉬운 글자로 인간의 도리를 깨닫고 억울한 재판을 받지 않도록 방지해 주려는 측은지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오래 전부터 중국 문자인 한자가 양반을 중심으로 깊게 자리 잡고 있던 터라 한문에 대적하는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이 혹여 명나라의 눈 밖에 나서 대외적으로 불리해지는 것을 우려하는 대신들의 염려가 상소로 이어졌다.

한글 연구에는 당시 석학들이 모인 집현전의 학사들이 몇몇 참여를 했는데 이들은 한글이 단순히 중국 한자의 또다른 표기정도로만 알았다. 그래서 한글을 만드는 과정중에는 반대를 하지 않았고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세종과 최만리

하지만 한글로 중국책을 번역하려하자 최만리를 비롯한 집현전의 학사들이 반대상소를 올렸고 세종의 노여움을 사 모두 하옥되었다. 그러나 이내 하옥된 신하들을 모두 풀어주고 그들의 오해도 풀어주려 했지만 최만리는 이에 응하지 않고 사직을 청하고 두문불출 하였다.

 

 

최만리는 상소에서 한글이 기묘하고 특출한 글자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중국의 높은  학문을 익히는데는 부끄러운 글자이며 임금이 체력저하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연구에 몰두하는 것이 염려스럽고 게다가 동궁이나 공주까지 참여하는 것이 걱정된다 하였다.

그리고 글자를  쉽게 익히게 되면 깊고 높은 중국 학문을 소홀히 하여 가벼운 공부를 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다. 거기다 이러한 사실이 명나라에 알려지면 외교문제가 될 수도 있음도 지적하였다. 당시 오랫동안 한자를 습득한 양반들과 명나라와의 관계를 볼 때 당시로서는 충분히 우려할만한 문제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을 세종도 인지하였다.

 

 

500년 전의 소통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임금에 대한 최만리의 무례함을 엄하게 다스려야 하지 않느냐 하자

"노랫소리가 듣기 싫다하여 새를 죽이려 함은 옳지 않다"

하고 최만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그의 자리를 비워 두었다. 그의 상소에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는 진심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최만리, 청렴의 상징인 청백리라 칭송을 받은 인물로 세종 1년에 문과 급제하여 집현전에서 관리생활의 대부분을 했던 세종시대의 석학이었다. 인품이나 학문의 깊이로 볼 때 그의 상소문이 그저 무지한 사대주의가 아님을 인지했기에 세종은 듣기 싫은 쓴소리를 들어주고 반박하며 그를 설득하려 하였다.

 

한글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 한글 사용을 반대했던 최만리, 두 사람의 진심은 조선과 백성의 안위였다. 다만 생각의 기준이 달랐을 뿐이다.

하늘이 내린 지존의 임금이지만 두 귀를 활짝 열어두고 싫은 소리도 마다하지 않은 세종은 500년 전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