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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맨해튼 프로젝트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맨해튼 프로젝트과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일본인들에게 가장 싫어하는 과학자를 묻는 설문조사를 한다면 1위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선정될 것으로 예산된다. 그 이유는 인류 역사상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원자폭탄이라는 참상을 온 몸으로 느꼈던 일본인들이기에 그렇다.

 

 

 

원자폭탄 개발의 배경

 

무슨 얘기일까?

 

일본에 투하된 두 개의 원자폭탄은 1939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우라늄의 원자핵 분열을 이용하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폭탄을 만들 수 있습니다. 독일은 이미 원자핵 분열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미국도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위기감을 느낀 미국 정부는 1942년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럽의 물리학자들을 중심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시작하게 되었다.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 이다.

 

그리고 맨해튼 프로젝트의 목표는 일본이 아니고 독일이었다.

 

 

▲ 맨해튼 계획의 연구책임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그리고 3년 후인 1945 7월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모래사막에서 인류 최초의 플루토늄 폭발 실험에 성공하게 된다.

 

'원자폭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조차 버섯구름의 위력을 직접 본 후 "나는 죽음의 신이 되었다."라고 자조하였으며, 원자폭탄 개발에 참가한 과학자들은 원자폭탄을 실전에 사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트루먼의 결정, 일본에 떨어진 리틀보이와 팻 맨

 

아인슈타인도 원자폭탄 개발을 제안한 것을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투루먼은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부은 신무기를 한 번 써 먹지도 못하고 버릴 생각이 없었다. 단지 과녁을 어디로 해야 할 지가 문제였다.

 

원래 목표였던 독일은 이미 원폭 개발을 포기했으며 항복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녁은 쉽게 정해졌다. 마지막 남은 교전국 일본이 원폭의 표적으로 정해졌다. 또한 전후에 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던 트루먼은 빨리 2차 대전을 끝내고 싶었기에 역사상 최악의 사태를 야기한 원폭 투하 결정을 사인을 하게 된다.

 

결국 두 개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상공에 사흘 간격으로 투하되었고 일본은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 항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945 8 6일 오전 8 15 30, 태평양 비행기지를 출발한 미국의 B29가 히로시마 상공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원폭의 이름은 '리틀보이(Little Boy)' 였다. 리틀보이가 히로시마에 투하된 순간 오렌지색 섬광과 거대한 버섯구름이 피어 올랐으며, 도시의 60%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놀라 게이(B29 이름)에서 원폭 투하 광경을 지켜보던 조정사는 ", 하느님,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습니까"라고 중얼거렸다. 이날 사망한 히로시마 시민은 7 8천 명이며 부상 및 행방불명 된 사람이 5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사흘 후인 8 9일 오전 1, 두 번째 원자폭탄 '팻 맨(Fat Man)'이 나가사키 교외에 투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