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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Book

[소설] 칼의 노래 - 임진왜란, 이순신장군 그리고 역사적 교훈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처럼 역사적인 고비고비마다 당대를 구원하는 영웅들이 무수히 많았다.

 

 

 

소설 '칼의노래'

일반인들이 보기엔 사람인 아닌 신적인 능력자처럼 보이는 그들도 사실은 약하고 두려움을 가진 필부였음을 엿볼 수 있는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는 영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속내를 가상으로나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책의 내용 중 명나라 장수들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는 화를 돋우지만 스스로를 지키지 못했으니 누구를 탓하랴.

1592년 (임진년),  왜구가 21만의 병력과 함께 부산 앞바다로 쳐 들어와 무방비 상태인 조선땅을 유린하며 한양 도성으로 향했다. 

왜구가 이미 상륙해 북쪽을 향해 진격하는데 봉수대의 불꽃 전달은 더디기만 하였다. 왜구가 쳐들어 왔음을 알리는 봉수가 한양에 도착하기까지는 4일나 걸렸고 조선군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20여일만에 왜구는 한양에 이르렀다. 

육상 전투가 속속 패전을 알리자 선조는 왕실 가족들을 데리고 북쪽으로 도망을 가게 되고 더 이상 왜구에 맞설 힘이 부족하자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게 된다.

 

 

이순신장군과 명나라 장수 진린, 유정

1597년 명나라 수군 총지휘관으로 진린이라는 자가 전용 요리사와 함께 조선의 구원병으로 오지만 1598년 5월까지 그는 강화도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조정은 진린이 스스로 출전하기를 눈치보며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명량전투 직후 내륙에 있던 왜구들이 남쪽으로 후퇴하자 이순신은 진린이 북쪽에서 몰아주기를 바랬다. 그러면 자신은 남쪽에서 밀어부쳐 양쪽에서 협공하자는 계산이었다.

"천병은 가벼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오. "

진린에게 조선의 전쟁은 강 건너 불구경같은 것이었다.진린의 말을 듣고 선조는 그를 달래서 출병케하고 이순신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화에서 머뭇거리는 수군을 타일러 보냈으니 예절 바르게 맞이하고 불편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서 천자의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라'  선조의 편지에 이순신은 한 숨이 나오는 것을 참으며 진린을 맞이하였다.

어렵게 차린 잔치상 앞에서 진린은

"소국이라 하더니 바다도 작고 물길이 좁아 개미싸움 같구려. 우린 개미싸움은 못하니 귀측이 먼저 나가면 장거리포로 엄호하겠소."

진린은 전쟁에 참여할 의지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치적을 증거할 전리품으로 조선인이든 왜구든 머리통 숫자를 채우기에 급급했다. 진린은 명나라를 내세우며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누구든지 먼저 지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다.

 

 

1598년 정월에 명나라 육군 1만 2천명을 이끈 유정이 압록강을 건너 왔지만 그는 적이 버리고 간 성을 교전 없이 접수하면서 천천히 남하를 하였다. 그는 한 곳에 머물면 3-4달씩 움직이지 않았다.

이동하고 주둔하는 게 유정의 전쟁 참여였다. 이순신은 유정에게 수륙합동작전을 제시하고 광양만에서 기다렸으나 유정의 상태를 살피는 전령의 보고에 다르면 깊은 밤 왜구로 보이는 이들이 궤짝 20여개를 유정의 막사에 들여 놓는걸 보았다고 했다.

천자의 구원병은 가벼이 움직이지 않았고 광양만에서 이순신은 왜구를 한 명도 보지 못하였다.

 

 

임진왜란과 역사의 교훈

1598년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은 적의 총격에 죽음을 당하지만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으니 자신의 죽음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하였다.

운명처럼 이순신과 함께 7년을 쫓아다닌 임진왜란은 이순신이 죽자 끝이나고 1599년 4월, 진린과 유정등 명나라 장수들은 돌아가 황제에게 전공을 인정받고 벼슬에 오른다. 

스스로를 천병이라 일컫는 명나라의 구원병의 오만함이 치를 떨게 하지만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면 누구도 지켜주지 않음을 역사는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