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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조선왕릉 이야기(4) : 선릉(성종), 연산군묘(연산군), 정릉(중종)



지금까지 계속해서 조선왕릉 이야기를 보신 분은 소개한 조선 왕릉들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눈치채셨을 게다.

조선의 임금은 27명이고 그들의 정비(첫째 왕비)도 27명이다.
그리고 정비가 일찍 승하할 경우 맞이하는 계비(두 번째, 세 번째 왕비)의 수까지 더하면 50명이 넘는다.

그런데 조선 왕릉의 수는 44기(1기는 북한에 있음, 후릉)라 했으니 숫자가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왕릉을 조성하는 형식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왕릉에는 왕과 첫째 왕비(정비), 둘째 왕비(계비) 등 여러 명이 각각의 능으로 안치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하나의 봉분에 두 명이 합장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왕릉의 수가 실제 왕과 왕비의 수보다 적은 것이다.

이러한 왕릉의 형식은 단릉, 합장릉, 동봉삼실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등이 있다.



제9대 성종 : 선릉

위치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 사적 제199호 / 1495년(연산군1) 조성

선릉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의 동원이강릉이다.
성종 능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의 능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쳤고, 인조 때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하였다.

조선 왕조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은 임금을 중심으로 문인, 무인 등이다.
임금은 태어나서부터 그들에게 교육을 받고 나중에 임금이 된 후에도 그들과 정사를 이끌어 간다.
그래서 죽어서도 임금의 곁에는 그들이 함께한다.
문인석과 무인석, 말(석마) 들이 서 있으며, 무인석은 오직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제10대 연산군 : 연산군묘

위치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번지 / 사적 제362호 / 1513년(중종8) 조성

연산군묘에는 연산군과 부인 신씨의 무덤이 함께 있다.
대군으로 예우하여 기본 구조를 갖추었으나, 병풍석, 석양, 석호, 문인석 등은 없다.
무덤 주변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이 있으며, 묘비 앞면에는 '연산군지묘'라 새겨져 있어 초라함을 더하고 있다.


제11대 중종 : 정릉

위치 : 서울 강남구 삼성동 131 / 사적 제199호 / 1562년(명종17) 조성

정릉은 문인석과 무인석의 높이가 3미터를 넘을 만큼 크다.
문무인석은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는 등 선릉과 함께 정릉의 수난을 알려 준다.

인종은 1545년(인종1)에 중종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하였으나, 한 달 후 고양시의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장경왕후(중종의 첫 번째 계비)의 능 오른쪽 언덕에 능을 새로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이후 17년 후인 1562년(명종17)에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위치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223-19 / 사적 제201호 / 1565년(명종20) 조성

태릉은 중종의 두 번째 계비인 문정왕후의 능으로 왕비의 능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웅장한 느낌을 주어, 이는 당시 문정왕후의 세력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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