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계속해서 조선왕릉 이야기를 보신 분은 소개한 조선 왕릉들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다는 걸 눈치채셨을 게다.
조선의 임금은 27명이고 그들의 정비(첫째 왕비)도 27명이다.
그리고 정비가 일찍 승하할 경우 맞이하는 계비(두 번째, 세 번째 왕비)의 수까지 더하면 50명이 넘는다.
그런데 조선 왕릉의 수는 44기(1기는 북한에 있음, 후릉)라 했으니 숫자가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바로 왕릉을 조성하는 형식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왕릉에는 왕과 첫째 왕비(정비), 둘째 왕비(계비) 등 여러 명이 각각의 능으로 안치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하나의 봉분에 두 명이 합장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니 왕릉의 수가 실제 왕과 왕비의 수보다 적은 것이다.
이러한 왕릉의 형식은 단릉, 합장릉, 동봉삼실릉, 쌍릉, 삼연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등이 있다.
제9대 성종 : 선릉
성종 능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윤곽이 굵고 강직하다면, 왕비의 능은 그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다.
선릉은 유난히 많은 변고를 겪었는데, 임진왜란 때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쳤고, 인조 때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 수리를 하였다.
임금은 태어나서부터 그들에게 교육을 받고 나중에 임금이 된 후에도 그들과 정사를 이끌어 간다.
그래서 죽어서도 임금의 곁에는 그들이 함께한다.
문인석과 무인석, 말(석마) 들이 서 있으며, 무인석은 오직 왕릉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다.
제10대 연산군 : 연산군묘
대군으로 예우하여 기본 구조를 갖추었으나, 병풍석, 석양, 석호, 문인석 등은 없다.
무덤 주변에는 연산군의 딸과 사위의 무덤이 있으며, 묘비 앞면에는 '연산군지묘'라 새겨져 있어 초라함을 더하고 있다.
제11대 중종 : 정릉
문무인석은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는 등 선릉과 함께 정릉의 수난을 알려 준다.
인종은 1545년(인종1)에 중종을 고양에 예장하고 능호를 희릉이라 하였으나, 한 달 후 고양시의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장경왕후(중종의 첫 번째 계비)의 능 오른쪽 언덕에 능을 새로 조성하고 능호를 정릉으로 고쳤다.
이후 17년 후인 1562년(명종17)에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에 의해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이 있는 현재의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위치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223-19 / 사적 제201호 / 1565년(명종20) 조성
문정왕후는 사후에 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 자신의 능과 함께 쓸 요량으로 장경왕후릉 옆에 있던 중종 왕릉을 선릉 부근으로 천장하였다.
그러나 새로 옮긴 중종의 능은 지대가 낮아 홍수 피해가 자주 일어나 그 자리에 함께 묻히지 못하고 현재의 위치에 안장되었다.
관련글 링크 : 조선왕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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