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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우리 조상의 유배 이야기' - 하멜과 코끼리도 유배를 갔다

 

동화 '우리 조상의 유배 이야기' - 하멜과 코끼리도 유배를 갔다

 

 

 

 

 

 

 

동화 '우리조상들의 유배 이야기'

 

유배는 죄를 지은 사람을 먼 곳으로 보내 자유로운 활동을 못하도록 하는 형벌이다.

 

유배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시작된 것은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으나, 유배제도로 시행된 것은 고려시대부터 이다.

 

 

 

 

 

유배지는 죄의 경중에 따라 2천 리, 2천오백 리, 3천 리로 정해졌으며, 전국에 유배지는 400여 곳이 있었다.

 

이 중에서도 제주도, 거제도, 흑산도가 조선의 3대 유배지라고 한다. 즉 한양에서 거리가 멀고, 살기가 어려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한양에서 가장 먼 곳이기에 조선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유배를 갔다.

 

 

 

 

 

유배를 온 죄인의 의식주는 유배지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담당한다.

유배지에서는 유배를 온 죄인에게 거주지를 마련해주고, 백성들이 집집마다 날짜를 정해 음식을 전해 주었다.

 

보통 한 고을에는 유배 온 죄인들이 열 명을 넘지 않았다.

 

 

 

하멜 아저씨도 간 유배

 

1653 8 18, 하멜 일행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다.

 

 

 

 

 

하멜을 발견한 제주도 군사들은 그들을 제주도 목사에게 데려 갔으며, 얼마 후 왕(효종)의 부름으로 한양으로 올라온 하멜 일행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으나 왕은 거절하였고, 하멜 일행은 왕의 호위대원이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은 하멜 일행은 마침내 여수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다. 이때 하멜 일행은 64명에서 22명으로 줄어 있었다.

 

하멜 일행은 외국인에게 배를 어렵게 구하여 1666 9, 드디어 탈출했다. 하멜 일행이 조선에 머문 기간은 13년이었으며, 하멜이 쓴 『하멜표류기』에 조선에서의 생활이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의 모습과는 다르게 그려져 있다고 한다.

 

 

 

코끼리가 유배간 사연은

 

14112월에 일본의 왕, 원의지가 코끼리를 바쳤다. 코끼리는 처음엔 임금이 타는 말을 관리하는 사복시에서 길러 졌다.

 

코끼리가 하루에 먹는 음식이 4인 가족이 두 달 먹을 정도의 양이었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식량에 대한 부담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우라는 관리가 코끼리를 보러 갔는데, 그는 코끼리를 보자마자 너무 못생겼다고 비웃고 침을 뱉었다. 이우의 행동에 화가 난 코끼리의 난동에 그만 이우가 밟혀 죽고 말았고, 조정의 대신들은 죄를 지은 동물도 벌 주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래서 코끼리는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코끼리에게 살해 당한 이우와 최초로 유배를 간 동물의 해프닝이 조선시대에 벌어졌다.

 

 

 

유배를 떠난 우리 조상들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유배지까지 걸어가는 유배 길은 험난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한번 유배를 떠나면 돌아오지 못했고,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지에 도착한 사람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임금이 계신 곳을 향해 절을 하거나 책을 읽고, 또 글을 쓰며 보냈다.

 

정약용과 정약전 형제, 윤선도와 같은 사람들이 유배지에서 쓴 글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특히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정약전의 <자산어보>, 윤선도의 <어부사시가>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뛰어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