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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창/느낌있는 여행

덕수궁, 조선의 마지막 왕조 그 쓸쓸함을 만나다


겨울 초입의 날씨가 가을과 겨울을 모두 품고있다. 쾌청한 하늘에 기온이 차가왔다.
가능하면 가을에 오대궁궐을 모두 돌아볼 계획이었는데 벌써 겨울이 되었다.

궁궐 나들이 네번째로 덕수궁을 돌아보았다. (경희궁-경복궁-창경궁은 돌아보았다)
개인적으로 덕수궁은 다른 궁궐과는 다르게 궁궐같은 느낌이 덜했던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번 궁궐나들이를 계기로 덕수궁은 어는 궁궐 못지않게 소중한 궁궐로 다가왔다.

덕수궁의 동문인 대한문(본래 이름은 대안문)으로 덕수궁의 정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대한문을 지키는 수문장들이 서있다.
대한문 앞에서는 수문장교대식이 진행되는데 색다른 볼거리이다.


궁궐을 방문하면 '궁궐지킴이'들이 안내를 해주신다. 물론 혼자서 고궁의 정취를 즐기는 것도 좋겠지만 궁궐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듣는 재미도 아주 좋다. 덕수궁을 안내해 주신 궁궐지킴이 자원봉사자이시다.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을 들어가는 중화문이다. 원래 덕수궁의 정문은 중화문이었다. 조선 궁궐의 정문은 문이름에 화(和)가 들어가 있다. 광화문(경복궁), 돈화문(창덕궁), 흥화문(창경궁), 홍화문(경희궁)이다. 그리고 중화전에 이르는 조정이다. 위 사진들은 지난 9월에 방문했을때 사진이다. 사진 속에 나무들의 푸르름이 다른 사진과 다르다.


중화전도 궁궐의 위용을 갖추어 중층으로 지었으나 1904년 큰 불이 난 뒤 다시 지으면서 단층으로 축소되었다.
중화전 내부의 용상과 일월오봉도가 정전의 위상을 보여준다.



편전으로 쓰인 즉조당과 석어당은 덕수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곳이다. 선조가 임시로 거처했을 때부터 사용된 곳이다.
석어당은 덕수궁 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층 전각이다. 선조가 승하한 곳도 이곳이다.


즉조당준명당이다. 
즉조당은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식을 가진 건물이라고 한다.
준명당은 고종의 늦둥이 딸인 덕혜옹주를 위해 국내 최초의 유치원이 설립된 장소이기도 하다.
또한 준명당의 명자가 특이하다. 밝게보일명이라고 당시에 가장 유행한 글자라고 한다. 


덕홍전은 외국 사신을 접견할 목적으로 지은 전각으로, 외부는 한옥이지만 내부는 서양식으로 꾸몄다. 가운데 꽃문양은 이화(자두꽃)으로 대한제국의 문양이다. 또한 덕홍전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보관한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고종은 명성황후의 시신을 꽤 오랜기간 안치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왕비의 신분을 황후로 명하기 위해서 였다고 하니 고종의 아내사랑은 남달랐었나 보다.



함녕전은 고종의 편전이자 침전으로 사용되었다. 고종이 승하한 곳도 함녕전이다.
다른 궁궐과 달리 덕수궁에 왕비의 침전이 따로 없는 것은 명성황후가 승하한 뒤, 고종이 따로 왕비를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관헌은 함녕전 뒤편에 궁궐 후원의 정자기능을 대신하여 지은 전각으로, 고종은 이곳을 외국 외교관들과 연회를 열고 커피를 마시는 장소로 애용하였다. 건물이 러시아풍으로 지붕이 양철인게 특이하다. 설계자는 러시아인으로 독립문을 설계한 사람과 동일인이라 한다.


석조전은 고종황제가 침전 겸 편전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서양식 석조 건물이다. 덕수궁에 서양식 건축물들을 건립한 것은 대한제국 근대화를 위한 정책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이 사진도 지난 9월에 찍은 사진이며, 지금은 내부 공사 중이어서 사진 찍기가 힘들었다.  아래쪽 사진은 석조전 서관으로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궁을 방문하면 습관적으로 보는게 어처구니들이다. 덕수궁 궁궐의 지붕 위에도 어처구니가 늠름하게 서있어 반가웠다. 
그리고 건물 처마에 단청이 너무 아름다워 사진에 담았다.

 

덕수궁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크게 두 차례 궁궐로 사용되었다.

한번은 임진왜란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가 머물 궁궐이 마땅치 않아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궁궐(정릉동 행궁)로 삼으면서 부터이다.

경운궁(덕수궁의 원래 이름)이 다시 궁궐로 사용된 것은 조선말기 러시아공관에 있던 고종이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부터이다.

덕수궁을 나오며 다른 궁궐에 비해 유난히 썰렁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궁 안에 울타리처럼 둘러선 일본을 비롯한 각국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점점 힘을 잃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지켜보던 고종의 눈물과 명성황후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들리는것 같았기 때문이다. 
 
묘하게도 조선이 국난에 휩싸였던 어려운 시기마다 궁궐로 사용되었기에 덕수궁은 그렇게 좋은 터의 궁궐자리는 아닌 것 같다.